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문단 편집) === 2009 === [[파일:external/pbs.twimg.com/BHDKeAMCUAAgxb8.jpg|width=300]] ~~일단 눈물을 닦자~~ 스폰서인 옐로우나인[* 옐로우나인은 스폰서가 아니다. 스폰서는 포스터 하단에 보면 말그대로 협찬, 투자사에 있는 회사들이 스폰서이지, 옐로우나인은 아티스트 섭외와 현장의 컨디션을 일부 담당했을 뿐이다. 어쩌면 가장 큰 부분인 섭외력도 사실 후지락에서 계약하고 받아오는거라 큰역할은 아니다.]과 결별한 이후 진행한 첫번째 페스티벌로서 이때를 기점으로 라인업의 네임벨류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더구나 빈약해진 라인업을 보완하기 위해 국내 밴드 위주로 자리를 채우다보니[* 보통 마지막 헤드라이너는 해외밴드가 맡는게 관례였지만 마땅히 섭외한 해외밴드가 없다보니 [[노브레인]]과 [[부활]]이 각각 첫째날과 마지막날 헤드라이너로 나왔다.] '홍대포트'란 오명까지 듣기도 했다. 거기다 하필 지산 록 페스티벌[* 당시 첫 개최였던 지산 록 페스티벌은 [[위저]], [[폴 아웃 보이]], [[오아시스(밴드)|오아시스]] 등 희대의 사기 라인업을 내세워 가볍게 판정승을 거두었다.]과 날짜까지 겹치는 바람에 여러모로 가장 혹평을 받았던 해였다. 그나마 섭외에 성공한 해외밴드 중 이름값있는 밴드가 [[데프톤즈]]여서 헤비니스 리스너들을 끌어들였기에 망정이지[* 실제로 데프톤즈 보러 금요일 지산-토요일 펜타-일요일 지산이라는 강행군을 택한 팬들도 제법 있다.] 안 그랬으면 파산급으로 망할 뻔했다. 이때 당시 옐로우나인 김형일 대표가 2009년 3월에 오아시스가 섭외됐다면서 예스컴 사장에게 전화해 펜타포트가 잘 열릴 것처럼 이야기 했다는 것도 예스컴 사장 기자회견을 통해 알려진 사실. 거기다가 펜타포트 상표권 등록을 옐로우나인에서 진행하다가 예스컴 기자회견으로 진행을 철회했다. 만약 이때 당시 여론이 없었더라면 안산 락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단 펜타포트라는 명칭 사용권은 인천시에 있다. 또, 2009년 펜타포트는 행사 몇 달을 앞두고 지산 밸리라는 페스티벌을 따로 하겠다고 통수까지 쳤다. 알고보니 이미 2008년 펜타포트가 끝나고 나서 CJ와 합작해 부지 렌탈작업까지 진행되고 있었던 상황. 업계에서는 천하의 개쌍놈 취급 당하고 있지만 지금 안산 라인업뽕에 취해 일부 밸리빠들에 의해 맹목적으로 빨리는 중이다. 굳이 의의를 찾자면 [[IDIOTAPE]], [[로맨틱펀치]] 등 이후 음악적으로 크게 성장했으나 당시 기준으로는 무명이었던 밴드들이 비록 관객들에게 소외될 수밖에 없는 시간대이긴 해도 록 페스티벌 무대에 설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는 점 정도. 하긴 라인업이 워낙 궁해서 인디씬에서 신진급이던 밴드들까지 끌어모으다 보니 어쩔 수 없었긴 했다. 이후 펜타포트 측에서도 [[흑역사]]로 취급하는듯 하다. 가끔 홍보영상으로 2010년, 2011년, 2012년 영상은 틀어주지만 2009년 영상은 단 한번도 틀지않았다. 스폰서인 '옐로우나인'으로부터 독립하고 한차례의 흑역사를 치른 뒤인 2010년 펜타포트 부터 새로운 시작으로 인정하는 분위기. 하지만 시각을 바꿔서 달리 보면 주관사의 분열로 인해 '펜타포트'라는 브랜드의 명맥 자체가 끊길 뻔한 위기의 상황에서 홍대 인디밴드들이 총출동하여 호흡기를 달고 락페 하나를 살린 그런 의미깊은 한 해였다고 볼 수도 있다. 이 해 어떻게든 3일 일정을 성사시켰기에 망정이지 아예 개최 자체가 무산되었으면 2010년 이후의 펜타포트 역시 존립이 위태로웠던 상황이었다. 또한 이 때 몇 안되는 해외밴드로 참가했던 인스펙터 클루조는 5년 후 다시 펜타포트를 찾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로 [[의리]]의 대명사와도 같은 락페였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